외로이스무삶
by 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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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언제나 칼날을 쥐고 살아라. 손바닥을 가르고 미끄러져 들어오는 칼날을 온힘을 다해 움켜쥐고 살아라. 고통에 무뎌지지 말고, 고개돌리지 말고, 언제나 그 고통을 뇌리 속에 새기고 살아라. 칼은 언제고 너를 찌르려 들것이나, 손에서 고통이 느껴짐은 아직 칼날이 네 몸에 닿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함을 기억해라.
 아무런 고통 없는 삶은 이미 칼을 놓친 삶이다. 나태하게 보낸 시간은 반드시 스스로에게 복수해온다. 칼날이 지금 당장 너의 몸을 난도질 하지는 않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네 주변을 배회하며 기회를 보고있을 뿐이다. 헛되이 보내는 시간 동안 칼은 점점 벼려져 날카로워진다.
 그러니 그것을 고통이라 여기지 말아라. 칼날을 쥐었다는 것은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사력을 다해 칼날을 저지해라. 세상이 살갗에 닿는 고통을 온 가슴으로 느끼며 끊임없이 현실을 직시해라. 그리고 손잡이를 낚아채라.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때 이기는 것은 너다.


by 클  | 2008/06/03 00:11 | #낙서 | 트랙백 | 덧글(1)
2008.05.25

나의 오늘은 안녕하다



해장국 뻘건 국물 사이로
파리 한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김치 그릇 위를 종종걸음으로
뛰길래 손사래로 쫒아보낸

잠시 그것을 노려보다
숟가락을 상위에 겨누고
뚝배기 그릇을 멀찍이 밀쳤다

카운터에 말없이 6000원을 내고
박하사탕을 혓바닥 사이로 굴리며
봄길은 맑은데
오갈이 없구나, 아쉬워 하며
이번주 과외 수업 걱정을 하며
-녀석이 숙제는 했을까
-요새 공부는 하나
-그치만 아무렴 어떠해
이어폰으로 귀를 꽁꽁 도맨 채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길 어딘가에 침뱉고
40만원 과외비를 어디에 쓸까를
십만원 짜리 리바이스 청바지나
혹은 십 몇만원짜리 나이키 맥스
까짓 세켤레 사면 쫑나버리는구만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반쯤 농담, 반쯤은 노가리
그저 책 쌓아 계단만드는
know-how
앞글자 떼어 읽어주고, 별표를 몇개 그려주면
한달에 40이 굴렀다 티없이 하얀 봉투를
쳐다보지도 않고선 가방에 챙겼다

그러다 서점엘 들러
잡지 몇권을 보다 만화책 구경을 하다
수업에 쓸 문제집 한권을 들고
문득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께 빌려 읽은
[노동의 새벽]이 눈에 와 박힌다

그것을 카운터에 올리고 딴청하는 내게
점원은 이만 천 팔백원 입니다- 하는데
지갑엔 이만원 뿐이라
나는 흰봉투를 아쉬워...
혀를 내밀듯 퍼런거
한장을
봉투에서 꺼냈다
파리가 손 비비듯, 낼름

어디선 촛불이 강가를 가득 메웠다 하고
그곳에선 전경이 방패를 휘둘고 살수차가 물을 뿌리고
해도 나의 생활은 여전히
황도黃道면을 걸었다
천칭좌의 모서리 어디쯤에서
과외비로 번 돈을 술잔에 붓고
장학금을 나이프로 썰고
생활에 매여 뱅뱅 돈다
그렇게 해장국 펄펄 끓는 뻘-건 국물에
파리가 삶아져도
배운것, 생각한것, 믿은것이 휘청여도 
나의 오늘은 그렇게 안녕하다
by 클  | 2008/05/26 23:25 | #문학소년컴플렉스 | 트랙백 | 덧글(4)




 수 없이 많은 인공위성이 지구를 감싸고 항주했다. 그것은 헤엄치듯 자리를 바꾸어댔다. 그것들의 접시는 반짝거리는 분홍, 초록, 파랑, 노랑. 
 어느순간 그것들은 일제히 제자리에 멈추어, 지구를 향해 빛을 쏘았다.
 까마득한 우주를 소리없이 메우며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by 클  | 2008/05/10 03:29 | #낙서 | 트랙백 | 덧글(3)




'너'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정말 한줌도 되지 않는 어떤 장면 장면으로 남았을 뿐이지. 복도의 사물함이나 노을진 창가에서 반짝이던 먼지처럼 기억날 뿐이야. 그땐 그랬어. 세상이 끝장날줄 알았지. 이렇게 골동품 장식품처럼, 기억의 서랍 속에서 다시 꺼내 이리저리 살피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어.
가끔 그시절 그 복도를 찾아가, 기억속의 너에게 말을 걸어보곤 해. "내가 그렇게 싫었냐?" 하면 너는 큰 입으로 그저 웃을 뿐이지.
그때의 나는 아마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며 중얼거렸을거야. 너에대한 일종의 변명이랄까.




by 클  | 2008/05/10 03:13 | #낙서 | 트랙백 | 덧글(2)
어느날



 숙모가 사라졌다. 이른 아침 걸려온 전화를 엄마는 담담하게 받았다. 외할머니는 차가운 겨울 새벽의 안개를 물리치고 숙모를 찾았다. 삼촌은 새벽 일찍 일을 나가고 없었다. 엄마는 차분하게 이모에게 전화를 걸고, 다시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엄마, 일단 들어와서 외국인 등록증 있나 찾아봐. 외투도 찾아보고. 잠깐 산책나간걸지도 모르니까 일단 집에 들어가. 응? 날씨 추워." 그러나 엄마도, 할머니도 숙모가 잠시 산책나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외삼촌은 어제도 집을 찾아와선 엄마에게 한탄하듯이, 이래서야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걸 그랬어- 라고 말했다. 삼촌이 돌아간 후에, 엄마는 너네 삼촌 불쌍해서 어쩌니, 라고 읇조렸다. "걔는 너네 삼촌이랑 계속 살 애같이 안보이더라. 느이 삼촌 돈없어지고, 늙으면 바로 이혼하자고 달겨들텐데 그럼 어쩌니." 나는 엄마에게 에이, 설마? 라고 받아쳤지만, 엄마는 신념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그 전화를 그렇게 담담히 받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숙모는 베트남에서 왔다. 외삼촌보단 스무살 남짓 어리고, 나보담은 한살이 많다. 삼촌은 작년까지 미혼이었고, 내가 수능준비에 맘졸이던 시기에 베트남행 비행기를 탔다. 엄마와 이모에게 등떠밀리듯이였고, 모든 비용은 이모부가 부담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베트남에간 삼촌은, 미처 짐도 풀기전에 여자 스무명을 소개받았고, 그날 바로 숙모를 택했다고 했다. 엄마의 걱정은 둘쨋날 걸려온 삼촌의 그 전화부터 시작했다. 막내에 늦둥이 삼촌이 사람볼줄 모르고 얼굴에 혹한것 같다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 까칠하고 불평많은 삼촌이 그렇게 맘에들어한다는 것이 내겐 신기하게 느껴졌고, 이걸로 잘된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숙모가 한국에 도착한것은 수능이 끝난 뒤였다.
 할머니는 그날부터 늘상 웃는 얼굴이셨다. 할머니는 딸 대하듯 숙모를 끼고 다니며 이것저것 물건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고, 이모는 그날 바로 옷가게에 들러 십몇만원짜리 파카를 사입혔다. 따듯한 곳에서 왔으니 추울것 아녀, 하고 웃으시며였다. 할머니와 이모는 막둥이의 늦깍이 장가를 숙원사업의 성공인 마냥 싱글벙글해 했고, 한시도 쉬지않고 숙모의 이름을 불렀다. 숙모의 이름은 '라우' 였다. 라우 티 수엔.
 못미더워 하는건 오직 엄마뿐이었다. 엄마의 불만은 숙모가 너무 어리고, 이쁘고, 똑똑하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쁜것이 며느리로 들어왔다며 좋아했고, 엄마는 그 이쁜게 승철이랑 평생 살겠냐며 걱정했다. 그러나 이미 숙모는 한국에 왔고 엄마 역시 열심히 숙모의 한국생활을 돕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한달이 지나지 않아 숙모는 사라졌다. 결혼을 의심찬 눈초리로 바라보던 마산에서, 꽃이 피면 결혼식을 새로 올려주겠다는 전화가 온지 삼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러나 결혼할 숙모는 사진만 남고 없었다. 


by 클  | 2008/04/22 01:53 | #낙서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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